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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K]/디자인 브릭

디자이너의 레퍼런스

by BRIKER 2021. 4. 3.

거미처럼 생긴 레몬 짜는 도구인 '주시 살리프'를 디자인한 ‘필립스탁’이 하루에 두번밖에 오갈 수 없는 텔레비전도 전기도 없는 섬에서 지낸다는 기사를 보고 너무 놀란던 기억이 난다. 파격적인 아이디어로 유명한 세계 최고 그래픽디자이너'슈테판 자그마이스터'는 7년에 한번 창조적 영감을 위해 안식년을 갖는다고 한다. 그 장소가 세계적 대도시가 아니라 발리라고 해서 정말 의외였다.

디자이너라면 당연히 트랜드에 민감해야하고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하는데, 이 두 디자이너는 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첨단의 도시 문명 안에서 전시도 보고 카페도 가고 매월 쏟아지는 잡지들도 봐야 영감이 찾아 온다는 내 믿음에 큰 균열이 생겼다.

매번 트렌드를 파악하고 관련 디자인을 조사를 한다고 핀터레스트나 비핸스(세계 최대의 디자이너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뒤지던 습관을 그만 뒀던 것도, 프로젝트를 시작하자마자 디자인 책이나 잡지부터 집어 들던 걸 멈췄던 것도 , 구글 검색창부터 열어두던 습관을 버린 것도 그 때쯤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레퍼런스가 아니라 새하얀 종이를 마주했다. 그 위에 일단 프로젝트의 개념부터 적어 내려갔다. 개념을 설명할 이미지를 떠올려 봤다. 안 떠오르면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하는 연습을 했다. 덮어 놓고 자료들을 찾는데 시간을 쓰는 게 아니라, 원래 내 안에 있던 것들을 레퍼런스로 해서 생각을 발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처음엔 조금 막막하고 답답했지만, 익숙해지자 더 크고 넓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인터넷 화면 속에서, 책에서만 보여주는 것보다 더 다채롭고 자유로운 레퍼런스를 만날 수가 있었다.

물론 그래도 막히거나 답답할 땐, 검색을 통해 다른 디자이너들은 그걸 어떻게 풀어냈는지를 참고한다. 시각적 이미지를 참고한다기보다는 해결을 위한 방법론을 공부하고 따라해 본다. 아마도 필립스탁이나 슈테판 시그마이스터가 외딴 섬같은 곳에 지내면서도 디자인 감각을 유지하고 뛰어난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방식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내가 그 두분같은 대단한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내가 쌓아 온 경험이, 오롯이 내 생각이 가장 일순위 레퍼런스가 돼야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 매거진브랜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