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쇼핑센터의 시작
지금은 비록 위상이 많이 내려왔다고는 하지만, 한 때 저에게 코엑스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복합쇼핑몰이였습니다. 고교시절 서울에 처음 놀러왔을 때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코엑스였어요. 무슨 외국 관광객처럼 들떠서 아셈타워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 광경을 지켜봤을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좀 많이 부끄럽습니다. 서울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을 2004년 당시에도, 코엑스는 여전히 강남 소비의 중심지였습니다. 저도 강남에 약속이 있으면 코엑스에 자주 방문했는데요. 이유는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백화점과 극장과 레스토랑이 모두 모여 있어 하루를 원스톱으로 보낼 수 있고, 더워도 추워도 눈이와도 비가와도 실내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요즘엔 그런 대형 복합쇼핑몰이 많아져서 그런 장점이 특별할 것도 없지만요.
그런데 코엑스를 올 때마다 힘든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미로같은 동선 때문에 멘붕에 빠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방향감각이 아주 뛰어나진 않지만 길치까지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도 헤맬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지상이라면 들쑥날쑥한 건물의 특징이라도 보고 찾을 수 있겠지만 지하에선 그럴수가 없었으니 참 답답하더군요. 비슷 비슷한 상가들 모습 때문에 위치 파악은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코엑스만 오면 장시간 쇼핑 때문에 지치기 보다는, 길을 헤매다가 지칠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돌아 다닐수록 머리 속에 선명한 지도가 그려져야 하는데, 갈 수록 꼬이는 기분이랄까.
아래 뉴스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그런 기분을 저만 느낀 게 아니었나 봅니다.
2015년에 "IS연계조직 코엑스 폭파 협박"이라는 기사가 떴을 때의 댓글입니다.
' IS도 코엑스 들어오는 순간 길 잃는다고 하네요 ' (베스트댓글님)
' 폭탄은 설치해도 빠져나갈 출구를 못찾아서 Fail '(실사폰님)
한편 이런 제목의 웃지못할 기사도 있더군요.
'결국 쇼핑몰 설계자에게 당한 건가' (한겨례 21, 2015-02-16)
공간·방향감각을 잃고 빙빙 돌고 우연에 의한 소비를 하고… 복합쇼핑몰 코엑스몰에서의 ‘험난한 길찾기’
설마요. 그럴리는 없을겁니다. 헤매기만하는 경험이 좋을리가 없다는 건 공간 전문가들인 설계자들이 더 잘 알테니까요.
그 많은 사인들은 왜 필요했던 걸까 ?
방문도 하기 전에 헤매는 공포와 이런 저런 이유들로 한동안 찾지 않다가 '코엑스'가 '스타필드 코엑스'로 바뀌고 나서 처음으로 가봤습니다. 이슈가 되고 있는 '별마당 도서관'이 궁금하기도 했구요. 삼성역을 나와 주출입구 쪽으로 나와 보니 크게 바뀌진 않았더군요. 실내로 들어가니 조금씩 변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 눈에 띄는 것은 사인물들이었는데요. 여기저기, 사방팔방, 너무나 과할 정도로 배치가 돼 있더군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안내데스크까지 있었습니다. 딱 헤매기 좋을 지점에 절묘하게 배치했고, 통행하는 사람들의 동선을 헤치지 않는 배려가 좋았습니다. 많은 사인들 때문에 길 찾기는 좋아졌는데, 약간의 시각공해라는 생각도 살짝 들었어요. 그래도 정처없이 헤매이는 것보다야 잠깐 눈을 버리는 게 어쩌면 나은 일일겁니다. 기둥의 유도사인, 천장에서 내려오는 행거사인, 전체 맵 사인, 디스플레이로 된 터치형의 사인, 그것도 모자라 인쇄물과 안네데스크까지,,,과도한 친절같았지만 길목의 곳곳에 있는 그런 사인들 때문에 놓칠뻔한 위치를 바로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방문자들의 동선과 편의를 세심하게 고려한 기획자들의 고민아 엿보였습니다.
기획에 따라, 다른 공간이 된다
기획 주체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놀라웠습니다. '없는 걸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 '있는 걸 새롭게 하는게'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죠.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정말 아무나 생각하긴 힘든 일입니다. 아마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신세계 백화점, 신세계 첼시, 파미에스테이션, 최근엔 하남 스타필드까지 신세계가 그 동안 보여 온 공간창출의 노하우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스타필드라는 브랜드를 달고 새롭게 단장한 코엑스는 사실 불과 몇년 전에도 큰 리뉴얼을 단행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주로 낙후된 시설의 리모델링 수준이었는데요. 큰 효과도 못보고 돈만 썼다고 상인들의 불만이 심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기사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제법 이슈가 된 뉴스가 됐나봅니다.
그런데 이번에 돌아보고 왜 그렇게까지 심각했는지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스타필드의 리뉴얼이 2015년 당시의 대대적인 리모델링 때보다 얼마나 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큰 틀에 있어서는 그 때와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코엑스의 상인들의 상황이 크게 나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직접 돌아본 현장의 느낌은 더 생동감있고 활기 차 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마당 도서관, 코엑스의 에펠이 되다
이런 변화의 핵심은 아무래도 ‘별마당 도서관’일 겁니다. 저는 사실 압도하는 도서관 규모의 놀라움보다는, 서재 곳곳을 채우고 있는 샘플용 책 때문에 놀라움과 실망감이 더 컸습니다. 대여도 할 수 없는 껍데기로 채워진 곳이 무슨 도서관이냐는 생각도 들고, 장삿속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불편한 마음으로 둘러보고 있는데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 때문에 생각이 좀 바뀌더라구요. 다들 놀라고 행복하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대한민국 강남의 한복판 최대의 상업지구 안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였어요. 보기 싫는 점들도 있겠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사람들에게 이런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그걸로 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긍정적인 문화적 경험으로 이런 신선한 즐거움까지 선사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작게라도 좋은니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해 고객들의 문화적, 정서적 만족해내기 위한 시도가 계속 됐으면 하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별마당 도서관이 '도서관'이라는 공간의 내용보다는 지하 영토에서의 '랜드마크'라는 외형적 요인에 주목했습니다. 도서관이라면 거대한 규모에 맞는 방대하고 다양한 서적 컨텐츠가 있어야 되는데 그런 역할은 애초에 할 수는 없으니 컨텐츠가 모여있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합니다. 책을 제대로 읽거나 컨텐츠를 확실하게 얻고 싶다면 각 지자체나 대학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을 가야 하는게 맞겠죠? 하지만 별마당 도서관에서는 진짜 도서관에서도 느낄 수 없는 특유의 감성과 분위기가 있습니다. 충분히 가치있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서관'이 아니라 거대한 책장이 있는 '북카페'같다고 할까요.
별마당 도서관이라는 상징물 하나가 코엑스라는 지하 영토의 체질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에펠탑이 없던 '밋밋한 파리'가 에펠탑이 존재하는 '특색있는 파리'로 변화한 느낌입니다. 에펠탑은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하지만 관광객들로 하여금 그 주변의 위치를 파악하는 나침반 같은 역할도 합니다. 실제로 파리여행을 했을 때 에펠탑을 나침반 삼아 도심의 주요 관광지를 수월하게 여행한 기억이 있습니다.
코엑스에 온 여행자들에게도 별마당도서관이 그런 역할을 할 것입니다. 결국 스타필드 코엑스는 별마당 도서관이라는 상징공간을 가짐으로써 매력적인 '감성공간'으로 완성됐다는 생각입니다.
이미 온라인이 대세가 됐고 온라인 기반의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지만, 여전히 오프라인에서의 매력적 경험은 사람들을 끌어 모읍니다. 그 경험의 중심에 '공간'이 있습니다. 오프라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오감의 자극들이 그 공간안에는 있습니다. 공기의 흐름과 음악과, 향과, 만질 수 있는 다양한 질감들이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총제적인 경험을 가장 잘 줄 수 있는 것이 공간의 매력이겠죠. 코엑스가 별마당도서관 하나로 매우 큰 긍정적인 변화를 이뤄내고 죽어가는 상권도 살렸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작은 공간들 안에도 그런 재미와 감성이 녹아있는 공간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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