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디자이너로 취업 준비 할 때, 포트폴리오 컨셉이 ‘노스타일 디자이너’였다. 고정된 스타일이 있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프로젝트의 성격에 맞게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카멜레온같은 디자이너라는 걸 어필하고 싶었다. 다행이 그 생각이 면접관들에게 긍정적으로 다가갔는지, 쉽지 않을 것 같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더벅머리 촌놈의 가능성을 알아봐주시고 채용까지 해주신 분들이 지금 생각하면 더없이 고맙다.
채용할 때 신입 디자이너들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기대하지만 이내 실망할 때가 많다. 디자인의 해결방식이 꼭 새롭고 획기적인 것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풀어가는 방식, 접근하는 방식이 오히려 더 중요할 때가 많은데 그건 단번에 짧은 시간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끔 놀라 자빠질만한 퍼포먼스와 아트웍의 신입 디자이너가 있기 마련이고 금방 빛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아주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프로젝트를 하면 할수록, 아는 게 많아질수록, 더 좋은 실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디자인 해법이란 게 무조건 신선하고 새로운 것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자인 현장이 얼마나 다양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상상해 보면 하나라도 더 경험 해 본 디자이너가 유리할거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유리한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다시 스타일 이야기로 돌아와서. 신입시절을 지나고 경력이 쌓이다보면 자기 스타일을 애써 만들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스타일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디자인은 아트와는 다르게 자신을 드러내면 안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디자인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자신만의 본능적 감각과 취향이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자연스러움을 머리로 깨기에는 역부족일만큼 강력하다.
이 건 비단 나뿐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디자이너를 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도 자신의 느낌과 감각은 디자인에 투영되기 마련이다. 같이 디자인 작업을 하다보면 서로의 작업과정을 보지 않아도 리뷰를 할 때는 누가 어떤 디자인을 했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생긴대로 디자인한다’라는 예전 회사 대표님께서 했던 말씀이 떠오른다. 정말 공감했던 게 브랜드 디자인을 하던, 광고 디자인을 하던 심지어 자동차 디자인을 해도 디자이너의 모습이 그 디자인 결과물에서 보인다는 거다. 어떤 디자이너는 성격에 맞게 항상 밝고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형태와 색상으로 표현해 내는 반면, 또 다른 디자이너는 강렬한 색상대비와 과감한 형태감으로 문제를 풀어내기도 하고, 또 어떤 디자이너는 무척 현학적이면서 추상적 접근으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디자인들을 뽑아내기도 한다.
이런 사적인 해석이 스며는 디자인 결과물들이 나는 절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감정이나 취향이 드러나면 안된다는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감각의 영역을 그렇게 딱 기계적으로 맞춰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안 그럴려고 해도 그렇게 되는 게 사람이니까. 수학 공식처럼 딱딱 떨어지는 일이 아니라, 감각의 영역을 건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정이나 감각을 빼면 맹탕의 결과물이 될테고, 그런 디자인에 사람들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건 비단 나처럼 평범한 디자이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디자이너들은 오히려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실하다. 그건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문제를 해결해간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시각적으로도 확고한 자신들만의 스타일이 존재한다. 멀리서 보면 자기복제를 한 것 같을 때도 있다. 프로젝트를 맡긴 회사는 모두 다른데, 그 결과물을 모아 놓은 포트폴리오를 보면 하나의 디자인 시리즈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런 현상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옹호하고 싶다. 디자인에는 일말의 감정이나 취향이 절대 섞여선 안된다는 강박이 디자인을 시작한지 한참을 지난 이제서야 풀려가고 있다. 물론 고정된 스타일이 있는 디자인만을 추구하거나 옹호하자는 건 절대 아니다. 모든 스타일을 맞출 수 있는 만능 디자이너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각자 잘하는 걸 더 잘하게 갈고 닦아서 서로의 역할 분담을 하자는 말이다.
이 디자인 스타일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얘기한 건 애초에 의뢰인이나 디자이너가 서로 스타일의 코드가 잘 맞는 상대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나는 이게 프로젝트 성공의 절반이상이라해도 과장이 아니라고 본다. 서로 합이 어느 정도 맞고 디자인을 풀어가는 방식에 대한 공감이 있어야 중간 중간 일어나는 변수와 이견에 쉽게 대응할 수 있다. 당연히 서로 만족하고 소비자도 만족하는 디자인이 나올 수 있는 분위기가 된다.
디자인 실무경력이 십년이 넘어가는 나 정도의 경력에서는 '노스타일 디자이너'라는 게 이젠 전혀 장점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단점일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내 스타일은 이겁니다라고 확실히 보여주고 거기에 맞는 클라이언트들을 만나는 편이다. 그렇게 되니 서로 일하기 편하다. 쓸데없는 에너지를 줄이고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데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나만의 디자인을 풀어 나가는 스타일을 더 강화해 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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